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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원 목요칼럼] 죽음에 관한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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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신기원 목요칼럼] 죽음에 관한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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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원(신성대학교 사회복지과 교수)

 

살아가면서 가장 두렵고 생각하기 싫은 일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죽음에 관한 것이다. 개인적으로 죽음은 생각만 해도 무섭고 공포스러운 단어이다. 하지만 현재 살아있는 우리는 모두 언젠가 죽어야 한다. 태어난 것이 필연이었다면 죽음 역시 필연적인 것이다.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고 생각하기 조차 싫어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필자가 유추하기에는 이 세상과의 단절이나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영원한 이별로 인한 안타까움, 가보지 않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 이 세상에서 아직 무엇인가 할 일이 남았다는 아쉬움 등 때문일 것이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그동안 나름대로 피땀을 흘려 기반을 쌓아놓고 재미있게 살고있는 이 세상에서 아무런 정보도 없고 무슨 일이 벌어질지 전혀 알 수 없는 저 세상으로 간다는 것은 모험이 아니라 극도의 불안감을 안겨주는 사건이다. 그리고 혈연관계든 연인관계든 또는 친구관계든 선후배관계든 다양한 정서를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들과 헤어진다는 것은 말할 수 없는 슬픔을 가져다준다. 또한 나이를 불문하고 나름대로 미래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현재에 충실하며 사는 것이 우리네 삶인데 갑자기 그것을 그만두는 경우가 생긴다면 얼마나 많은 미련과 아쉬움이 남겼는가.

 

하지만 우리가 희망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이 세상으로 초대받았듯이 우리의 기대와 다르게 죽음으로 인도되는 것이 인생살이라고 할 수 있다. 세상을 계획적으로 치밀하게 사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죽음을 정확하게 예상하고 받아들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만큼 죽음은 예고 없이 찾아오는 갑작스러운 손님이다. 이러한 불청객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그것이 살아남은 자들의 과제이다.

 

필자가 예전에 절절하게 불렀던 백세 인생이라는 노래가사를 보면 구십 세에 저 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알아서 갈 테니 재촉 말라 전해라, 백세에 저 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좋은 날 좋은 시에 간다고 전해라라는 구절이 있다. 고령화시대를 살아가는 인간들의 수명에 대한 속마음을 해학적으로 잘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실제 저승사자에게 이렇게 이야기하고 각자가 선택해서 저 세상으로 가는 것이 인생이라면 얼마나 속 편하겠는가.

 

호스피스운동의 선구자이며 정신의학자인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인생수업이라는 책에서 우리가 죽음을 통보받으면 부정-분노-타협-절망-수용의 단계를 밟는다고 하였다. 물론 그렇다고 모든 사람들이 수용의 단계까지 이르고 죽는 것은 아니다. 개중에는 죽음에 대해 부정이나 분노만 하다가 죽을 수도 있고 어떤 이는 타협하다가 또는 절망하며 죽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죽는 것이 바람직할까. 어려운 일이지만 수용하는 것이다. 즉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반드시 죽게되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래야 평화가 온다. 하지만 이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내공이 필요한 것이다.

 

얼핏 생각하여 수용은 포기하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러나 포기가 죽음이라는 상황을 외면하고 등을 돌리는 행위라면 수용은 죽음이라는 한계상황을 마주하고 정면으로 대응하는 행위이다. 인간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죽음이라는 한계상황에 대해 절망하며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바로 수용이다. 죽음을 수용하면 새로운 세상이 보일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을 선택하지 않았지만 이곳 지구에 와서 각자 개성 있는 삶을 살고 있듯이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맞이한 죽음 이후에도 또 다른 무엇인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인류가 오랫동안 고민했고 아직도 명쾌한 답을 주지 못하고 있는 죽음에 대한 이러한 사유는 종교와문화를 만들었고 관습을 형성하며 미신을 낳았다. 이렇듯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는 각자 개개인 선택의 몫이다. 죽음 속에 묻혀서 죽음 같은 삶을 살 것인가 아니면 죽음을 받아들임으로써 삶 같은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 그것이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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